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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역사/인물

정 약 용

다산 정약용(1762.6.16~1836.2.22)

 

출생지 / 경기도 남양주

 

다산은 1762년 아버지 정재원과 어머니 해남윤씨 사이에서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태어난 곳은 한강 강변 마현 마을(현재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이다.

 

10세부터 과예(課藝) 공부를 하기 시작했고 아버지가 잠시 벼슬을 하지 않고 있는 동안에 경전(經典)과 사서(史書) · 고문(古文)을 매우 부지런히 읽었으며, 또 시율(詩律)을 잘 짓는다는 칭찬을 받기도 했다.

 

다산은 1776년 풍산홍씨와 결혼하였다. 홍씨부인과 다산 사이에는 63녀의 9남매가 있었으나 대부분이 요절하고 21녀만이 살아남았다.

 

1777년 다산은 자신의 학문형성에 큰 영향을 끼친 스승을 만나게 되었으니 바로 성호 이익이다. 다산이 두 살 되던 해에 성호가 세상을 떠나 직접 가르침을 받은 것은 아니었지만 성호의 길을 접하고 학문을 굳히게 되었다.

 

오늘날의 다산이 있기까지에는 여러 사람들의 도움이 있었지만 그 중 무시할 수 없는 이가 바로 정조이다. 개혁 군주이자 뛰어난 학자였던 정조는 다산을 보호해 준 방패막이이자 동시에 경전에 관해 서로 토론하고 잘못된 점을 비판하였던 학문적 스승이자 친구였다. 또 스러져가는 나라를 바로 세우기 위해 의기투합하였던 정치적 동지였다.

 

다산은 자연과학과 기술, 특히 이용후생과 관련된 기술분야에서 독창적인 업적을 남겼는데 매년 봄 화성의 현륭원(사도세자의 묘)에 능행(陵幸)을 위한 한강을 건너기 위해 필요한 배다리를 만들어낸 다산은 1792년 겨울 부친상으로 3년상을 치르고 있던 중 정조로부터 화성(수원성)축조를 위한 기술적 설계를 지시 받게 된다. 다산의 성설(城說)을 설계지침으로 하고, 채제공(蔡濟恭)을 중심으로 조심태(趙心泰) 등의 진력으로 이룬, 뛰어난 과학적인 구조물인 화성(수원성)은 돌과 벽돌을 혼용한 과감한 방법, 거중기(擧重機) 등의 기계를 크게 활용하고 용재(用材)를 규격화한 점, 화포를 주무기로 하는 공용화기 사용의 방어구조 등은 다른 성곽에서 볼 수 없는 새로운 것이었다.

 

정조가 서거하고 순조가 즉위하면서 다산의 생애 최대의 전환기를 맞는다. 소론과 남인 사이의 당쟁이 신유사옥이라는 천주교 탄압사건으로 비화하면서 다산은 천주교인으로 지목받아 유배형을 받게 된다. 다산의 나이 40이었다. 신중하면서도 용기를 지녔던, 중앙과 지방에서 두루 행정경험을 쌓았던, 장차 명재상이 될 것이 예상되었던, 조선을 새롭게 했으리라 기대할 수 있었던 다산. 그러나 다산은 먼 귀양길을 떠나야 했다.

 

첫 귀양지는 포항 장기였다. 이때 다산의 셋째형 정약종은 옥사하고 둘째형 정약전은 신지도로 유배되었다. 9개월이 지난 후 황사영 백서사건이 발생하자 다산은 다시 서울로 다시 불려와 조사를 받고 정약전은 흑산도로 정약용은 강진으로 옮겨지게 되었다. 다산은 주막 골방에서 머물면서 주막집을 동천여사(東泉旅舍)’라 일컬었는데, 42세 때 동짓날 자기가 묵던 작은 방을 사의재(四宜齋)라 불렀다. 생각을 담백하게 하고, 외모를 장엄하게 하고, 언어를 과묵하게 하고, 행동을 신중하게 하겠다는 뜻이다. 다산은 47세 때(1808) 봄에 강진읍에서 서남쪽으로 20리쯤 떨어진 다산(茶山)의 귤동(현재 강진군 도암면 만덕리)에 있는 산정(山亭)으로 옮겼다. 이 초가가 유배생활 후반부 10년을 머물면서 역사에 빛나는 학문적 업적을 남긴 다산초당이다.

 

경학 이외에 경세학(經世學)과 다방면의 실용적인 학문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리하여 유배 초기에는 64서에 관한 경학연구서 232권의 저술을 마쳤고, 나중에는 경세유포, 목민심서 등의 저술을 마쳤다.

 

57세 되던 해 가을 유배에서 풀려 고향으로 돌아온 다산은 이미 이루어진 저술을 수정하고 보완하는 데 힘쓰며 자신의 학문과 생애를 정리하였다. 이때 미완으로 남아있던 목민심서를 완성하였으며 흠흠신서를 저술하여 경세론의 삼부작(12)을 완성하였다. 또한아언각비등의 저작을 내놓았다. 회갑을 맞이해서는 자찬 묘지명을 지어 자신의 생애를 정리하기도 하였으며, 북한강을 유람하여 여유있는 생활을 보내기도 하였다.

 

흔히 다산을 '실학의 집대성자'라고 얘기한다. 이익에서 유형원으로 이어지는 학통을 계승하며 탈주자학적 경학체계를 세워 19세기 초 실학파의 철학적 입장을 확립한 다산은 성호학파와 북학파의 주장을 한데 묶어 '실사구시'의 용광로 안에 녹였다가 '다산학'이라는 자신만의 독창적 학문을 완성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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