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진문화원

영랑 김윤식(1903.1.16~1950.9.29)

출생지 / 전남 강진군

1903년 강진의 오백석지가 부유한 김종호의 2남3녀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강진 보통학교(현 강진 중앙초등학교)와 휘문의숙을 거쳐 동경 청산학원 영문과 중퇴

1919년 위문의숙 재당 당시 독립선언문을 구두 안창에 숨겨 고향에 내려와 강진의 독립운동을 주도 하다가 검거되어 대구 형무소에서 6개월간 복역 하였으며,

1920년 동경 유학시절 박열(학명가이자 무정부주의자)과 같은 방에서 하숙하다가

1923년 9월 관동 대지진으로 학업을 중단하고 귀국했다.

1919년 3.1운동 직후 김현구, 차부자, 김길수등과 강진에서 청구 라는 학문 동인지를 발간

1933년 동경유학 때 사귄 박용철과 함께 시문학 동인지 창간을 주도하였다.

1945년 해방 후 대한독립 축성회 강진군 단장으로 활약

1948년 초대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하였으나 낙선

1949년 8월부터 약 7개월간 공보처 출판국장을 역임

1950년 6.25전쟁시 복부에 파편을 맞고 쓰러저 9월 29일 48세로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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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 정약용(1762.6.16~1836.2.22)

 

출생지 / 경기도 남양주

 

다산은 1762년 아버지 정재원과 어머니 해남윤씨 사이에서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태어난 곳은 한강 강변 마현 마을(현재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이다.

 

10세부터 과예(課藝) 공부를 하기 시작했고 아버지가 잠시 벼슬을 하지 않고 있는 동안에 경전(經典)과 사서(史書) · 고문(古文)을 매우 부지런히 읽었으며, 또 시율(詩律)을 잘 짓는다는 칭찬을 받기도 했다.

 

다산은 1776년 풍산홍씨와 결혼하였다. 홍씨부인과 다산 사이에는 63녀의 9남매가 있었으나 대부분이 요절하고 21녀만이 살아남았다.

 

1777년 다산은 자신의 학문형성에 큰 영향을 끼친 스승을 만나게 되었으니 바로 성호 이익이다. 다산이 두 살 되던 해에 성호가 세상을 떠나 직접 가르침을 받은 것은 아니었지만 성호의 길을 접하고 학문을 굳히게 되었다.

 

오늘날의 다산이 있기까지에는 여러 사람들의 도움이 있었지만 그 중 무시할 수 없는 이가 바로 정조이다. 개혁 군주이자 뛰어난 학자였던 정조는 다산을 보호해 준 방패막이이자 동시에 경전에 관해 서로 토론하고 잘못된 점을 비판하였던 학문적 스승이자 친구였다. 또 스러져가는 나라를 바로 세우기 위해 의기투합하였던 정치적 동지였다.

 

다산은 자연과학과 기술, 특히 이용후생과 관련된 기술분야에서 독창적인 업적을 남겼는데 매년 봄 화성의 현륭원(사도세자의 묘)에 능행(陵幸)을 위한 한강을 건너기 위해 필요한 배다리를 만들어낸 다산은 1792년 겨울 부친상으로 3년상을 치르고 있던 중 정조로부터 화성(수원성)축조를 위한 기술적 설계를 지시 받게 된다. 다산의 성설(城說)을 설계지침으로 하고, 채제공(蔡濟恭)을 중심으로 조심태(趙心泰) 등의 진력으로 이룬, 뛰어난 과학적인 구조물인 화성(수원성)은 돌과 벽돌을 혼용한 과감한 방법, 거중기(擧重機) 등의 기계를 크게 활용하고 용재(用材)를 규격화한 점, 화포를 주무기로 하는 공용화기 사용의 방어구조 등은 다른 성곽에서 볼 수 없는 새로운 것이었다.

 

정조가 서거하고 순조가 즉위하면서 다산의 생애 최대의 전환기를 맞는다. 소론과 남인 사이의 당쟁이 신유사옥이라는 천주교 탄압사건으로 비화하면서 다산은 천주교인으로 지목받아 유배형을 받게 된다. 다산의 나이 40이었다. 신중하면서도 용기를 지녔던, 중앙과 지방에서 두루 행정경험을 쌓았던, 장차 명재상이 될 것이 예상되었던, 조선을 새롭게 했으리라 기대할 수 있었던 다산. 그러나 다산은 먼 귀양길을 떠나야 했다.

 

첫 귀양지는 포항 장기였다. 이때 다산의 셋째형 정약종은 옥사하고 둘째형 정약전은 신지도로 유배되었다. 9개월이 지난 후 황사영 백서사건이 발생하자 다산은 다시 서울로 다시 불려와 조사를 받고 정약전은 흑산도로 정약용은 강진으로 옮겨지게 되었다. 다산은 주막 골방에서 머물면서 주막집을 동천여사(東泉旅舍)’라 일컬었는데, 42세 때 동짓날 자기가 묵던 작은 방을 사의재(四宜齋)라 불렀다. 생각을 담백하게 하고, 외모를 장엄하게 하고, 언어를 과묵하게 하고, 행동을 신중하게 하겠다는 뜻이다. 다산은 47세 때(1808) 봄에 강진읍에서 서남쪽으로 20리쯤 떨어진 다산(茶山)의 귤동(현재 강진군 도암면 만덕리)에 있는 산정(山亭)으로 옮겼다. 이 초가가 유배생활 후반부 10년을 머물면서 역사에 빛나는 학문적 업적을 남긴 다산초당이다.

 

경학 이외에 경세학(經世學)과 다방면의 실용적인 학문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리하여 유배 초기에는 64서에 관한 경학연구서 232권의 저술을 마쳤고, 나중에는 경세유포, 목민심서 등의 저술을 마쳤다.

 

57세 되던 해 가을 유배에서 풀려 고향으로 돌아온 다산은 이미 이루어진 저술을 수정하고 보완하는 데 힘쓰며 자신의 학문과 생애를 정리하였다. 이때 미완으로 남아있던 목민심서를 완성하였으며 흠흠신서를 저술하여 경세론의 삼부작(12)을 완성하였다. 또한아언각비등의 저작을 내놓았다. 회갑을 맞이해서는 자찬 묘지명을 지어 자신의 생애를 정리하기도 하였으며, 북한강을 유람하여 여유있는 생활을 보내기도 하였다.

 

흔히 다산을 '실학의 집대성자'라고 얘기한다. 이익에서 유형원으로 이어지는 학통을 계승하며 탈주자학적 경학체계를 세워 19세기 초 실학파의 철학적 입장을 확립한 다산은 성호학파와 북학파의 주장을 한데 묶어 '실사구시'의 용광로 안에 녹였다가 '다산학'이라는 자신만의 독창적 학문을 완성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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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의사 26인 명단-
(1차거사)
김영수 의사 (당시나이 27세, 강진읍 춘전리 출생)
김학수 의사 (당시나이 25세, 강진읍 송정리 출생)
김안식 의사 (당시나이 24세, 강진읍 서성리 출생)
김성수 의사 (당시나이 21세, 강진읍 남성리 출생)
김위균 의사 (당시나이 20세, 강진읍 서성리 출생)
김현상 의사 (당시나이 20세, 강진읍 서성리 출생)
양경천 의사 (당시나이 20세, 강진읍 동성리 출생)
김계명 의사 (당시나이 19세, 강진읍 남성리 출생)
김만철 의사 (당시 나이 19세, 강진읍 남성리 출생)
김병우 의사 (당시나이 19세, 강진읍 서성리 출생)
김영호 의사 (당시나이 19세, 강진읍 서성리 출생)
김윤식 의사 (당시나이 18세, 강진읍 남성리 출생)
(2차거사 합류)
김재문 의사 (당시나이 36세, 강진읍 서성리 출생)
강주형 의사 (다이나이 33세, 강진읍 남포리 출생)
최덕주 의사 (당시나이 33세, 강진읍 남성리 출생)
이기성 의사 (당시 나이 25세, 강진읍 서성리 출생)
김성수 의사 (당시나이 24세, 강진읍 동성리 출생)
김후식 의사 (당시나이 24세, 강진읍 동성리 출생)
박영옥 의사 (당시나이 23세, 강진읍 남포리 출생)
김현봉 의사 (당시나이 22세, 강진읍 서성리 출생)
오응추 의사 (당시나이 22세, 강진읍 서산리 출생)
이은표 의사 (당시나이 22세, 도암면 용화리 출생)
오승남 의사 (당시나이 21세, 강진읍 서성리 출생)
황호경 의사 (당시나이 21세, 강진읍 서성리 출생)
김춘석 의사 (당시나이 18세, 강진읍 송전리 출생)
박일준 의사 (당시나이 18세, 강진읍 송전리 출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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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응추(1898.8.20~1969.9.15)

출생지 / 전남 강진군

1898.8.20~1969.9.15 / 3.1운동 / 대통령표창(92)

1919년 4월 4일 강진군 강진읍 장터에서 이기성, 오승남 등과 함께 만세시위운동을 계획하고 주민들을 규합, 장터에 모인 1,000여명의 시위군중과 같이 독립만세를 고창하면서 시위운동을 벌이다가 일경에 피체되었다.
이해 4월 15일 광주지방법원 장흥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월형을 언도받고 공소하여, 5월 21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원판결이 취소되고 징역 5월형으로 감형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2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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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한 섭

출생지 / (내용참조)

★ 김한섭(金漢燮)
본관 = 영광(靈光) 자 = 치용(致容) 호 = 오남(吾南) 월봉 광원(光遠)의 후손
○ 노사 기정진(1798~1876)에게 배우고 중암 김평묵(1819~1888)과 고산 임헌 회(1811~1876)와 도덕과 의리로 사귀다.
○ 일찍이 과거를 포기하고 사람이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에 대한 학문을 전문 적으로 연구하다.
○ 김 중암은 남해영수(南海領袖)라 높여 칭찬하고 고산 임헌회는 호를 지어 주 되 오남(吾南)이라 하다.
○ 이 내용으로 보아서 그의 인품을 알 수 있다.
○ 장흥의 흥룡단(興龍壇)에 중암 김평묵과 함께 모시고 문집 7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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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봉 채

출생지 / (내용참조)

★ 김봉채(金鳳采)
본관 = 청주(淸州) 자 = 백오(伯伍) 호 = 귤은(橘隱)
오우당 응수(應洙)의 아들이며 운평 송능상(1710~1758)의 제자이다.
○ 젊어서 부터 늙을때까지 호중(湖中)에 가서 공부하니 학식이 높은 선비가 되 다.
○ 성담 송문경( ? )과 근와 김 회(1729~1800)와 도덕과 의리로 사귀되 형제의 정을 맺으니 서울에서는 3형제라 하되 맨끝에 해당된다.
○ 학문과 예술, 품행과 도의가 모두에게 알려지다.
○ 직접 글을 지은 「성리예설 性理禮設」이 유고(有稿)에 드러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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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의 경(1704~1778)

출생지 / (내용참조)

★ 이의경(이의경1704~1778)
본관 = 원주 호 = 동강(桐岡)
○ 장헌 세자(1735~1762)의 부솔(副率)을 맡았다.
○ 사람이 지켜야 할 윤리와 준칙, 예악과 법도가 온 나라를 눈부시게 비추어 지식 계층에서 스승으로 삼고 본받다.
○ 문집이 있고 강진의 북쪽 40리인 성전면 월남리 월강사(月崗祠)에 향사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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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필 주

출생지 / (내용참조)

★ 오필주(吳弼周)
본관 = 해주 자 = 서경(瑞卿) 호 = 모재(慕齋) 진사 팽수(彭 )의 5세손

○ 우암 송시열(1607~1695)에게서 배우고 손재 박광일(우암 제자)과 서로 사귀어 오고 가다.
○ 두 선생의 의지와 취향을 몸소 경험하고 알되 철저하게 꿰뚫었다.
○ 성리학의 깊고 넓음이 공정하고 사심이 없어 세상 사람들이 공경하며 복종하 다.
○ 글 가르치는 집 건물을 안풍 마을에 짓고 명예와 이익을 구하지 않으며 대원 칙을 실행하다.

○ 세상을 떠나니 마을의 이름을 동자촌이라 하다.
○ 오필주의 의를 실천함이 동소남의 행의에 견주어 안풍처사(安豊處士) 라 칭하다.
○ 회산 홍직필(1776~1852)이 행장을 짓고 유고(有稿)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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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수 인(1601~1661)

출생지 / (내용참조)

★ 이수인(李壽仁1601~1661)
본관 = 연안 호 = 성암(惺菴) 문청공 청련의 후손

○ 타고난 성품이나 자질이 총명하고 지혜로우며, 의지와 정신이 엄숙하고 결백 했다.
○ 재주가 있고 영리하며 학식은 깊고 넓되 대대로 전해오는 교훈을 윗사람에게 서 받고 후진의 학자를 칭찬하며 추천하다.
○ 병자(1636) 이후로 주나라를 받드는 대 원칙을 굳게 간직하되 벼슬길에 나 아가기를 단념하다.
○ 월출(성전 안운리)의 암벽에 「대명건곤 학천유거 大明乾坤 鶴川幽居」8글자 를 크게 새겨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을 뜻을 드러내어 밝히다.
○ 우암 송시열(1607~1689)이 조정에 적극 천거하여 말하되 “이수인은 퇴직하 고 휴양할 절제가 있다” 고 칭찬하다.
○ 인조(1623~1689)때 생원 진사에 합격하여 문관에 오르고 벼슬이 홍문관 전 적과 한림에 오르다.
○ 현석 박세채(1631~1695)가 행장을 짓고 유고(有稿)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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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 강 중(1545~1627)

출생지 / (내용참조)

★ 윤강중(尹剛中1545~1627)
본관=해남 자=백신(伯伸) 호=석정(石井) 행당 윤복(尹復1512~1577)의 아들

○ 타고난 자질이 정직하고 성실하며 과거를 일삼지 않았다.
○ 아우인 흠중(欽中1547~1594)과 단중(端中1550~1608)이 함께 퇴계 이황(李 滉1501~1570) 선생에게서 주자(주희1130~1200)의 박문(博文 널리 사물의 도 리를 궁구함)과 약례(約禮 예법을 잘 지킴)에 대한 공부를 익히다.
★ 논어 옹야편 “군자 박학어문 약지이례”(君子 博學於文 約之以禮)

○ 퇴계 선생이 시를 지어 주고 행당과는 돈독히 지내다.
○ 독의(篤誼)
○ 윤강중 에게 회암 서절요 등본 8책을 표제를 써서 주니 대(代)를 이어 가보 로 간직하다.
○ 풍암 문위세(1534~1600)와 죽천 박광전(1526~1597)과 일죽재 신내옥 과 여러 어진이와 명옥대(鳴玉臺)를 함께 노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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